조각은 회화로부터 소외된 타자이고, 돌조각은 또 조각의 타자가 되었다. 돌조각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모델링(modeling, 첨가방식)이 아닌 카빙(carving,제거방식)에 의해 탄생되기 때문이다. 제거방식을 통해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낸다는 것은 마치 불교의 비움과 무소유의 의미와 통하는 것이고, 물질 속에 정신과 영혼이 존재한다는 신플라톤주의 미학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오늘날의 돌조각도 이 믿음에 근거해서 보고 싶다. 개념 아니면 안되는 시대, 개념이 물질을 간과하고 있는 시대에 여전히 19세기 방법으로 조각을 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은 귀 막은 오딧세우스에게 노래를 부르는 세이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예술보다도 여전히 과중하게 몸을 사용해야한다는 점,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나를 돌 조각가에게로 이끌었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 돌을 다루는 조각가를 만난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오늘 같은 하이테크놀로지의 시대에 돌을 다룬다는 것은 굉장히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귀중한 일로도 생각되었거든요. 요즘에는 조각가라는 이름도 조금 생소하거니와 게다가 돌조각을 한다는 것이 매우 낯설게 보인다는 말인데요. 먼저 돌조각을 왜 하는지 우문부터 던져야겠네요.
나는 외골수입니다. 돌조각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돌조각을 하는 이유요? 그냥 돌이 운명처럼 내게로 왔다고 해야 하나?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돌조각은삶의 과정과 똑같습니다. 알다시피 대리석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하고, 실수가 용인되지 않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감스럽게도 삶에 있어서 어떤 다른 취미를 가지고 살지 못한 것 같아요.
돌조각은 까다로운 애인 혹은 맘대로 안되는 자식 같은 존재네요. 살살 다루어야 하고, 엄청 공을 들여야 하고, 게다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처럼, 자꾸만 돌이라는 것에 천착해보게 되는데요. 예컨대 조형예술에서 작가와 재료의 관계를 보면, 어떤 재료를 다루는 사람은 그 재료와 닮았다는 말을 상식적으로 믿는 편인데요. 선생님과 돌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좀 소심한 편입니다. 입체를 다루어야 하는 조각가들이 그렇듯이 공간 소심증도 있고요. 한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전시장을 수도 없이 드나들면서 다시 작업을 돌아보고 수정하곤 합니다. 돌을 다루면서 '촉각에 의한 상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저에겐 대리석, 사암, 화강암 등 돌의 텍스 츄어가 중요합니다. 때로 그것들이 말랑말랑한 물질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마치 가변적인 속성을 가진 유연한 물질을 다룬다는 느낌이 저를 매혹하곤 하지요.
이탈리아 카라라국립아카데미에서 7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셨지요? 카라라에서 어떤 경험을 했나요?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카라라는 구상성이 강한 조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곳의 카라라 국립미술아카데미의 스승들에게서 조각의 기본이라고 할수 있는 인체 표현을 철저하게 공부했지요. 사실, 이탈리아는 생각보다 배타적인 나라인데 저는 그렇게 유학생활이 고달프지만은 않았어요. 물론 당시 로마와 바티칸에서 본 조각들을 보고, "나 조각가 맞아?" "내가 그들만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을 가졌고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들었죠.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한국을 떠날 때 인맥과 학맥 위주의 주류미술계에서 소외된 작가로서 이미 어떤 오기와 각오가 있었거든요. 카라라에서의 조각공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스승들은 학생들 특유의 감성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지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신의 조각은 유학 후 초기 작업보다 훨씬 더 쉽고 아기자기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 이런 방향으로 선회하셨는지요?
저는 관객의 호응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아무리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보았자, 나혼자 좋고 마는 그런 작품들을 만드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니까요. 여하튼 저의 작업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한번쯤 '사랑스럽다' '편안하다'는 기분 좋은 느낌들을 갖도록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다른 거대한 뜻은 없어요.
당신 조각은 구상적이긴 하지만 사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사실적인 면을 두리 뭉실하게 축약하고 추상화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인체 표현을 통해 정제된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투박하고 둔탁한 형태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사실적인 묘사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적으로 대상을 만들 다 보면 금새 싫증이 나는 거예요. 디테일을 사장시키면서 전체적 윤곽의 풍부함을 얻는 편이 훨씬 더 좋습니다. 세부를 생략하면 덩어리의 느낌이 훨씬 잘 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선생님 조각이 어떤 볼륨을 살리는 측면에서 조각 특유의 본질을 살리는 쪽으로 간다는 뜻이군요. 결국 조각의 본질이 볼륨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선생님이 만들어낸 여체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여체들은 전혀 에로틱하지는 않은데요. 물론 뷜렌도르프 비너스가 우리가 상상하는 에로티시즘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대지모로서의 원형을 지녔다는 사실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선생님 작품도 확고부동한 모성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볼륨뿐만 아니라 마치 이집트 조각처럼 거의 정면성의 법칙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그렇고요.
그렇지요. 여체는 인체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모성 원형에 대한 근사치에 가까운 것이지요. 풍만한 볼륨이지만 절제된 표현을 하는 편이구요. 그러니까 조각적 프로세스를 최소화하고 가급적 동세 표현을 절제한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치 시간을 정치시킨 듯 정적이고 관조적인 형상이 제가 추구하는 것이지요.
특히 2006년의 작품은 단순해졌지만, 내용적으로는 좀 유머러스해졌어요. 독립된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내러티브를 통해 기다림과 추억 등 일종의 한국적 정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전시는 유독 '관계'에 천착한 작품들이 등장하는데요. 예를 들면, 오케라스트라의 하모니를 느끼게 해주는 연작들이라든지, 부부상, 모자상, 가족상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작품으로 변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각하는 아내를 맞이했고, 아이 없이 살다가 뒤늦게 아이가 생겼지요. 그 후 제 작업은 매우 달라졌습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해 더 온정어린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이제는 '함께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 속의 사람들을 그립니다. 그것은 저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엄마와 어린아이, 어쩌면 그것은 인류가 소망하는 영원한 테마 아닙니까?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말입니다.
선생님 작업에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녹아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좀 부정적으로 얘기하자면, 신선하지 않은 그저 아주 익숙하다는 느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각적인 쾌감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좀 시간을 두고 보면,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면모가 새록새록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그것은 선생님이 대상을 다루는 데에는 어떤 굳건한 '믿음'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선생님이 대상을 바라보는 넉넉하고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것은 돌이라는 자연물과 접하면서 물아일여의 경지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죠. 제가 좀 미련하다시피 사물에 천착해요. 돌을 다루다 보니 아마 돌과 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돌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숨을 쉬고, 말을 걸어오고, 나긋나긋하게 유혹하는 듯이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강압적이고 무지막지하게 저를 꼼짝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돌이라는 영속적인 재료에, 정반대의 의미인 가벼움과 경쾌함이라든지, 편안함과 안온함을 주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술사에 등재된 작가들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로 보이는데요. 예를 들면, 피카소의 지속적인 실험은 그의 경제적인 부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론가로서의 세잔느의 작품은 그가 가족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여 이루어진 것이잖아요. 선생님도 이런 조각을 하시면서 나름대로 어떤 희생을 치루었을 것 같은데요.
말씀 드린 대로 돌조각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인내심을 요구하고, 투자한 시간
만큼 정교함을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저 작업실과 집을 오가며 살아야 했어요. 세속적인 삶의 환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할까요. 대한민국 사람이 거의 다 보았다는 '아바타'도 아직 보질 못했으니까요. 이제라도 좀 바꾸어 보고 싶지만, 그게 잘 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에게는 조각행위가 마치 종교적 절제 혹은 금욕행위와 같은 것이군요.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계속 유지될까요?
그런 것 같아요. 돌조각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저와 같은, 조금은 고립되고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대리석이든 화강암이든 돌 작업은 기나긴 시간과 집요한 집중을 원하는 일이라서 다른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저도 사람인데, 왜 쉽게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어요. 일이 너무 고되니까 이제 좀 쉽게 가자, 편하게하자, 그러는데 잘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배운 게 없고, 이게 내 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마음이야 늘 다른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싶지요. 그런데 천성에 장인기질이 있나 봐요. 작업실을 떠나면 불안하니까요. 작업을 안하더라도 작업실에 있어야 해요.
요즘은 대학에서 돌조각이 그저 커리큘럼 상의 요식행위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러운데요. 요즘은 학생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잘 보셨어요. 돌조각을 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지요. 그나마 몇 명이 있으면, 반가운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공존합니다. 아직도 이런 무모한 일에 도전하는 정신이 반갑고, 한편으로 이것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지 생계 문제가 걱정되고 그렇지요. 저의 경우 2년 정도 제자들을 데리고 있다가, 더 이상 제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없겠다 싶으면, 독립도 시키고, 유학도 보내고 합니다.
오늘날 조각은 퍼블릭 아트 개념의 조형물로 대치되었고,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는 조각가들이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공공조형물을 맡았을 때만 반짝 작업하고, 그 댓가로 받은 여윳돈으로 생활하곤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전형적인 조각의 개념도 사라지고, 그런 의미에서 조각가라는 개념도 전환을 겪고 있는 시대상황입니다. 한편으로 전통적인 의미의 조각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안타깝고, 한편으론 선생님 같은 분들이 남아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들리는데요(웃음).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앞으로 시대적인 흐름과 역행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원하는 작업을 하느냐를 말이지요. 영원한 숙제지요.
지금까지의 작업에 영향을 미친 작가는 누구였나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요.
저는 이르고 미토라이, 콘스탄틴 브랑쿠지와 페르난도 보테로, 이사무 노구치를 존경합니다. 브랑쿠지는 인간의 모습을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형태로 재현했습니다. <공간 속의 새>같은 작품을 보면, 실제의 새를 닮은 점이라고 하나도 없지만, 날렵한 곡선, 반짝이는 모양새는 한 마리의 새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그려낼 수 있는 어떤 날개짓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인물의 두상을 표현한 <잠자는 뮤즈>라는 제목의 반짝거리는 황동상은 얼굴과 별로 닮은 데가 없어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녔습니다. 이런 작품을 보면서 저도 그런 작품을 형상화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무 당연하게도요.
브랑쿠지의 작품은 정말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작품인 거 같아요. 한 때 선생님의 작품에서 브랑쿠지의 <키스>에 영향을 받은 듯한 작품이 있던데요. 그리고선생님 작업이 브랑쿠지적인 측면과 더불어 좀더 한국적인 모티브들과 결합되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선생님 작업은 보테로의 조각을 환기하기도 합니다. 보테로 역시 멘토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보테로야 이미 대중적으로도 예술적으로 국제적인 작가 아닙니까? 보테로의 뚱뚱한 인체 묘사는 언제나 사람을 즐겁게 하는 요소가 있어요. 조각의 본질이 볼륨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눈을 즐겁게 하고, 촉각적으로도 무한한 즐거움을 주지요. 여하튼 현실적인 면에서 제가 가장 닮고 싶은 작가 중 하나가 보테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기본 방침은 '즐거운 조각'이거든요. 더불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만드는 조각이거든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 자신을 대중의 취향에 수렴하려는 매우 수동적인 태도라고 생각되는데요. 보테로처럼 대중적 즐거움과 예술적 만족도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업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그거야 모든 예술가들의 바램이죠. 저 역시 숭고(혹은 우아)와 유머(재미)를 동시에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테로만 해도 그것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세계적인 명성을 거머쥐게 된 것이고요.
선생님 작품 속 인물의 표정이 너무 획일화되어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진정 그것이 우리 한국인만의 독특한 표정인지 아니면 그저 인류에게 보편적인 동심을 느끼게 해주는 표정인지 궁금합니다. 조각마다 각기 조금씩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면, 그러니까 인간의 희노애락을 드러내는 훨씬 더 역동적인 표정을 드러낸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요.
저 역시 그런 딜레마를 느끼고 있어요. 귀국 후 초기 작업에서 서양조각의 아르카익한 요소와 한국적인 거칠고 투박한 요소가 공존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것 역시 제가 풀어야 할 숙제이지요.
그래요. 귀국전에서 보여주었던 작품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그 작품들에서 우리 고유의 표정을 살짝 보았거든요. 서양조각의 아르카익한 미감과 한국 불교조각의 고졸한 미감이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한국 불교조각 중에서도 백제인의 얼굴이라든지, 미륵의 표정이 기묘하게 아름답게 다가오는 데요. 그것을 벤치마킹(웃음)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저 역시 오늘날 한국인의 잃어버린 정체성으로서의 그 온화하고 고졸한 인간미를 풍기는 얼굴 표정들을 다시 살피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해야겠지요. 예술이라는 게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잖아요. 그저 할뿐이지요.
"여기에 하나의 과제가, 세계만큼 위대한 과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제 앞에 서서 그것을 본 사람은 먹을 것을 찾아 손을 더듬으면서 어둠 속에 있던 한 무명의 사내였다. 그는 완전히 홀로였으니, 만일 그가 정말로 몽상가였다면 그는 아름답고 깊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꿈, 일생이 하루와 같이 흘러가버릴 수 있는 길고 긴 꿈들 중 하나를 꿈꾸었을 것이다. 세브르 공장에서 밥벌이를 하던 이 젊은이는 꿈이 손 안으로 솟아오른 몽상가였으며, 곧바로 이 꿈의 실현에 착수하였다. 그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알고 있었으니, 그의 내부에 있던 고요가 그에게 현명한 길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미 로댕과 자연의 심오한 일치가 드러난다." -릴케의 로댕 중에서-
대담/유경희(미술평론가/ PH.D.)
(이 글은 조각가 이경재와의 인터뷰를 근간으로 재구성된 인터뷰 에세이입니다.)
박숙영(조형예술학, 이화여대 교수)
조각의 역사는 인체 조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체는 오랫동안 많은 조각가들에게 작품의 주제 또는 소재가 되어왔다. 그것은 종교적 의미나 상징으로서, 또는 미학적 내용을 담아내는 조형적 실체로서, 아니면 작가의 특별한 정신이나 사상의 재현으로서, 등과 같이 여러 형태와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체의 표현은 구상에서부터 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거쳐 왔다. 설치, 환경, 미디어 아트 등과 같이 다양한 예술 형식 속에서 조각과 회화, 조각과 건축, 조각과 풍경 등의 관계 하에서 일어난 조각의 개념과 관련된 논의도 이미 논쟁거리에서 벗어난 지금, 더 나아가 미술과 음악,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과 같이 각 영역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요즈음, 조각의 전통적인 대상을 전통적인 재료와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조각의 본원적 가치를 추구하는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형태의 해체와 산업 재료의 사용으로 무게가 사라지고 중력이 상실되어 마침
내 회화처럼 시각적인 대상으로 남은 많은 현대 조각들 속에서 이경재는 중량감이
강조되는 돌을 직접 조각하여 인체를 표현한다. 모더니즘 시기의 어떤 인체상들은
표현주의자들이 인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또는 몇몇 예술가들에 의
해 2차 세계대전 후에 실존적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서 과장되게 변형되었었다. 혹
은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정신적인 차원에서 원시 문화에 경도되어 고졸적 고전
주의를 암시하는 인간 형태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경재는 인체 표현의 다양한 미술사적 흐름과 상관없이, 그리고 동시대의 경
향에 휩쓸리지 않고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자신만의 고유한 운율과 질서 속에서 인
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어떤 작가들이 인체를 분해하고, 입체주의적 추상성에서 활
용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며, 또는 표현주의로부터 도입한 인간 형상의 변형 방식
으로 현대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경재는 대리석이라는 고상한 재료를 조각하여
하나의 볼륨, 부동적인 정면성, 무게감, 대칭의 형태로 원형적이고 시간을 초월한
고전주의 방식으로 인체를 표현하는 역설적 방법으로 현대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작가가 갖고 있는 동서양의 고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더불어 그의 종교적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불상이나 서양의 종교적 의미가 깃든
원시적인 석상들에서 나타나는 단순성, 정면성. 부동성, 단순한 실루엣 등이 그의
작품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헨리 무어같은 작가가 아르
카익 문화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한 반쯤 누운 자세의 와상과 같은 작품이 이경재
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이와같이 그의 작품에서는 원형적인 고전의 영향을 발
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경재의 작품에서 보이는 단순한 비례, 부드러운 기하학적 형태의 몇 개의
덩어리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신체의 구조, 그 속에 절제된 볼륨으로 함축되어있는
신체의 골격, 우연성이 배제된 부드러운 윤곽면, 부분의 대담한 생략, 구 형태로 단
순화한 매끈한 얼굴, 전반적으로는 미묘한 질감의 표면 등 이 모든 표현 방식은 조
화와 균형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평화롭고도 따뜻한 정신세계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
이다. 그리고 손과 발 같은 신체의 작은 부분을 평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선으로 조각함으로써, 때로는 의복과 같은 부수적 요소를 극도의 저부조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섬세하고 절제된 감성의 파장을 일으킨다.
그동안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입상, 좌상, 와상과 같은 유형의 상을 단독상
으로 여성을 재현했거나 아니면 모자상, 또는 부부상과 같이 두 사람이더라도 하나
의 덩어리 속에 가두는 방식의 형태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것은
각각의 인물들이 독립적으로 구성된 군상이 등장한 것이다. 아무런 염려 없이 친구
들과 즐겁게 뛰어놀며 미래를 꿈꾸던 어린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마치 그 시절의
광경을 보는듯한 어린이상들이 그렇다. 특히 일정한 받침대 위에 놓인 다른 작품들
과 달리 비교적 높은 기둥 위에 각 상들을 올려놓는 방식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지
나간 세월만큼의 거리를 느끼게 하면서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각
각 비슷한 시절을 살았을법한 세 명의 남성들이 자신의 발아래의 그림자를 바라보
고 있는 군상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그림자의 위치는 서로 다른데, 그것은 각각의
인물들이 향하는 방향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은 미래일 수도, 현재일수도, 또는 과
거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경재는 그동안 다소 양식화된 구성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의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목욕하는 여인처럼 상황 속의 인물
상이나 가로등과 함께 있는 여인상을 만든 것에서도 발견된다. 그동안의 인체들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관념의 형상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형상들은 환경
속의 인간을 풍경처럼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의 인체가 단지 관념의 표상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관계를 담아내는 마음의 표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
해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돌 속에 영원한 생명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으로부터 파라오 의 조상( )이나 파라오의 집인 피라미드가 유래했다. 조상을 통해 영혼이 드나들고, 그리고 돌로 축조된 피라미드는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세계의 중심축이었던 것이다. 측량할 수조차 없는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돌은 바로 영원한 삶을 바라는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는 소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돌은 현실에 속한 것이기보다는 현실이 결여하고 있는 인간 이상의 대리물이 거나 보충물이었다. 돌은 시간과 관련된, 특히 영원한 시간과 관련된 상징적인 소재였던 것이 다.
그런가하면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고유한 형상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조각가는 창 의적이고 절대적인 주체라기보다는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그 고유한 형상의 부름에 응하는 수동적인 조력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돌을 영원한 시간에 대한 상 징으로 본 것과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 역시 돌에서 현재하지 않는 숨은 신을 보았던 것이다. 전해지는 미켈란젤로의 적지 않은 미완성작들이 이런 숨은 신과 예술가적 천재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말해주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이나 미켈란젤로의 돌조각에 대한 이해는 비록 그것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존재에 연유하지 않는 현실 저편의 무엇을 지 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렇듯 이경재의 여체를 테마로 하고 있는 돌조각 역시 구상적인 외관 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주의)적인 조각은 아니다. 상당할 정도로 양식화가 진척된 형상에서조 차 상징(주의)의 문법이 읽혀지며, 여체는 신체 자체에 대한 관심이기보다는 현재하지 않는 어 떤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 다가온다. 이런 양식화 내지는 상징의 문법은 이를테면 인체의 비현 실적인 비례와 작달막한 키, 풍만한 신체와 흐르는 듯 유기적인 곡선으로 과장된 신체, 세부의 과감한 생략, 평면의 저부조에 가까울 만큼 최소한의 볼륨에 부가된 희화화한 이목구비 등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양식화된 이경재의 여체는 그 풍만한 볼륨과 함께 지모( ) 혹은 대모( )에 이 어진 여성의 신화적 존재에 대해서 말해준다. 특히 가슴 가득히 과일을 안고 있어서 더 풍만해 보이는 여체는 여성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어머니이며, 생명과 생산과 생태를 관장하는 자 이며, 땅에 속한 자이며, 자연을 주관하는 신령스런 존재임을 대변한다. 풍성한 과일은 여성의 젖을 대신한 것이며, 다산( )과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여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작가의 작업에서는 고대 이집트 조각에서 유래한 듯한 영향사의 흔적이 느껴진다. 예 컨대 가급적 돌덩어리 본래의 형상을 유지하려고 조각을 최소화한 것이라든가, 마치 암각화를 보는 듯한 간략한 선각( )으로 대신한 손과 발이라든가, 팔과 다리를 몸통 안 쪽으로 거두 어 들여 가급적 동세 표현을 절제한 형상이라든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배 위에 얹거나 양팔 을 가슴 위에서 교차시킨 형상이 그러하다. 이렇듯 형상 표현을 가급적 절제하거나 조각의 프 로세스를 최소화한 형상에 대한 인상은 마치 시간을 정지시킨 듯 정적이고 관조적이다. 부연하면, 조각을 최소화한다는 것은 돌덩어리 본래의 생명을 되살려낸다는 것이고, 자연이 내재한 암시를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원한 삶과 시간 등의 대상의 핵심을 압축해내는 본질주의와 이상주의를 실현한다. 그리고 손을 배나 가슴 등의 신체의 특정 부위에 위치 시키는 것이 도상학적인 전례를 상기시키는데, 이는 작가의 작업이 상징적인 문법에 기대고 있 음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손이 생명의 근원이자 인간의 신체 중 자연과 통하는 통로랄 수 있는 배와 가슴을 감싸고 있는 식이다.
이런 상징적인 문법은 작가의 조각이 자연스레 어떤 영적인 실체에 이어지게 하는데, 특히 좌우대칭의 형상과 무표정한 눈이 그렇다. 좌우대칭의 형상은 시간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변 하지 않는 부동의 실체를 붙잡기 위한 장치인 것이며, 무표정한 눈은 비현실에 속한 어떤 것을 투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무표정한 눈이 있는가 하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이 자기 내면을 관조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일면적으로 부처의 얼굴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런가하면 웅크리고 있는 아동의 형상은 그대로 태아의 자세를 닮아 있으며, 그의 무표정 한 눈 역시 실재하지 않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눈은 아마도 과거이거나 생 명보다 더 오랜 생명의 원형이거나 유아기의 행복한 꿈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본래부터 꿈과 이상의 형태로만 존재할 뿐인 것들에 대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원초적 고향에 대한 상실감 으로 어떤 슬픔을 느끼게 한다. 사실 웅크린 자세는 인간의 형상 중 자연에 가장 가까운 근사 치이며, 상처받기 이전의 생명을 포만감으로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외에 작가의 작업에는 주로 여체를 다룬 독립상과 함께 두 형상이 합체된 조각으로써, 모 자와 부부상을 비롯하여 포옹하거나 마주 한 형상이 있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인간의 원초적 생명성을 표현하는 것 이외에도 보다 복합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관계 는 외관상의 형상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가족적인 단위나 사회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기보 다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인식의 결과로 보인다. 이를테면 '나는 너다'라는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식의 인간관을 형상화한 것이다. 똑같은 형상을 한 두 조상이 한 몸을 이루거나 마주 한 형국이 이런 인간관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렇듯 작가의 조각은 주로 여체와 아동, 그리고 그 관계를 다룬 구상적인 외관에도 불구하 고 실재하는 삶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대신 그의 조각은 이제는 상실한 고향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그리움과 바램을 함축한 이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산물이다. 조각을 받치고 있는 좌대가 그 의 조각이 현실과 분리된 것임을, 비현실에 속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의 조각이 고답적으로 보 이는 것은 대체로 비현실성이나 과거지향성에 연유한 것이며, 작가는 이런 과거의 시간 속에서 상실한 것들을 되새김질해 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미술사학자는 폴 세잔느가 사과를 그린 이후로 화가들이 그린 사과과
사람들이 먹어치운 사과 보다 더 많다고 발표 한적이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여자의 숫자 보다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그린 숫자와 조각으로 만든 여자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화가나 조각가에게 있어 여체라는 대상은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데 있
어 가장 기본적인 예술적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 이유로 동서를 막론하고 여체에 대한 예술가들의 탐구는 그 인간의 역
사 만큼이나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10 .3 Cm 크기의 석회암 조각
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3만년 - 2만5천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그 외에도 우리는 조형적인 측면에서 기원전 6천년전의 터어키에서 발견된
<여인 좌상>이나 <여인> 등에서 우리는 그들이 갖는 인체의 단순한 표현이
얼마나 아름답게 그리고 예술적으로 성숙한 채 완성 되어 있는 가를 볼 수
있다. 기원전 4 - 3000년전 이집트의 마마리아에서 발굴 된 테라코타로 만든 여인
상에서는 여체를 다루는 사람들이 갖는 예술적 감각과 그 높은 조형성의 아
름다움이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그 뛰어난 감각에 놀라게 한다.
물론 인체에 대한 이런 탐구 뒤에는 미적인 측면 외에도 기복적인 신앙의식
이 내재 되어 있음을 지나쳐서도 안 될것이다.
이렇게 연원이 깊은 인체에 대한 표현이 한 조각가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작업의 대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면 이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도 모른다.
이경재 작업의 출발은 비교적 초기부터 인체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아마도 청년기 수업시절 조각에 대한 기본적인 수업이 인체표현에서 부터 시
작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의 여체에 대한 애착은 그다지 특별 한것이 아
니다.
그는 그런 과정을 거친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스승 밑에서 조각의 기본이라고
할 인체표현을 철저하게 표현법을 체득 해 왔다.
그런 후 그는 "수세기 이래로 베르실리아 해변의 장관과 장엄하고 웅장한 알
프스 산맥에 둘러 쌓인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카라라" (아드리아노 가
스페리)로 건너가 카라라 국립미술원에서 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한국의 대부분 돌조각을 하는 작가들이 마치 " 에꼴 드 카라라 "라고 부를
만큼 그곳은 구상성이 강한 조각가들이 한국조각의 또 다른 흐름을 형성 해
왔다.
이경재가 줄곧 고집스럽게 돌덩어리를 고집 하는것도 , 그가 여체를 집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것도 이런 그의 예술적인 작업의 배경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여체들은 확실히 이전 그의 선배들의 작품과 공통점과 차이점이
섞여 있다.
예를들면 그의 작품에는 풍만한 인체묘사와 형태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 , 모
성애적인 사랑 의 감정을 담아내는 기교 등이 눈에 뛴다.
또한 극히 부분적인 표현- 눈과 머리- 으로 부부를 구별하거나 암시하는 기
법, 대칭적인 형태를 통해 비례의 아름다움을 각인 해 내는 기술은 이경재가
가장 자신 있어 보이는 부분으로 기존 작가들과의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체를 다루는 조각가들이 이러한 표현에 익숙하고 세련되
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특히 누워 있는 여인의 와상이나 입상에 대한 스타
일은 서양 조각에서 간간히 보아온 것이기도 하다.
여체에 대한 표현이 자세나 포우즈에서 한정적인 관계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
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작품의 경향들은 서양에서도 빈번하게 발견 된다.
여체에 대한 표현은 로댕의
<다나이드> 그리고 마이율의 <지중해>, 그리고
헨리무어에 와서 여체는 구상성의 절정을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 차이점보다
는 공통점이 더 많다. 그만큼 여체의 표현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며 독특
함을 가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 페르난도 보테로가 그 여체조각에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기
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풍만함과 아름다운 미의 조형에 충실하다면 오히려 이경재 조
각의 특징은 우선 한국적인 감성을 그가 담아내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경재는 그런 한국적인 감성을 그의 작품속에서 포근함, 수줍음, 포용 ,관용,
다정함 , 인자함 등으로 그들과는 다른 느낌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
여인을 표현한 작품 전체에서 보이는 따뜻하고 정겨운 것들은 모두가 다 수
줍은 자세와 팔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부분등에서 집약 되어 있다.
왜 인체를 강조하는 가를 이경재는 스스로 " 신이 창조한 삼라만상중 가장
선택 받은 아름다운 미" 라고 여체를 정의하고 있는데서도 명백 해진다 .
그러나 그의 조각의 비례나 형태는 다분히 서양에서는 말하는 비율이나 크기
기준에 상관 없이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이경재 조각의 특질은 그 인체의 정겨운 표현에 있으면서
형태나 크기를 비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조각에 주요한 특성
으로 드러난다 . 그 비현실적인 형태는 인간의 본능과 만나 새로운 감정을 야
기 시킨다. 예를들면 그의 조각속의 눈매와 표정등은 모성과 여성으로 가득찬 여인의 자
유스러운 그러면서도 수줍은 인상은 그가 얼마나 여인에 대한 눈길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확연히 보여준다.
반면 그는 대리석 덩어리에 그의 지문을 찍어가면서 그 안에서 여인 또는 모
성을 가진 어머니 , 여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자유와 평화를 얻고 있다.
거칠은 돌 덩어리가 하나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되살아날 때 그는 러시아 태
생의 미국 조각가 아키펭코 (A. P. Archipenko)나 헨리무어가 보여 주었던
언제나 아름다움과 생명성 그리고 구성의 원칙에 전혀 어굿나지 않게 노력
했던 체험을 작가의 한 이상으로 다짐 했을 것이다 .
그러나 좀더 젊은 작가로서 나는 그가 새로운 형태나 독창적인 양식을 구축
해 주길 기대한다.
아직 그는 너무 고전적인 것에서 얻어올 것이 많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1929년에 제작된 헨리 무어의 누워있는 와상들을 재현
하면서 그들이 그들의 언어를 세련 시켜 왔던 것처럼 고전적인 걸적들은 우
리에게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다. 1918년 빌헬름 렘부르크의 <남자 좌상>은 로댕에게 <생각하는 사람> 을
제작하는데 어떤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제 이경재에게 있어 하나의 과제는 그런 고전을 자신의 언어로 전이 시
키는 독창성을 보여줄 때이다.
그러한 그의 의지는 이미 이번 전시에서 명백하게 내보이고 있다.
이전의 작업보다 곡선이 많이 사용되고, 형태도 더욱 부드럽게, 형상을 고정
화 시키지 않는 작품들은 그러한 그의 새로운 변모를 예감케 하는 것들이다 .
그러나 아직도 많은 조각가들이 단순히 순수한 형태에 대한 탐미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반복적인 여체를 되풀이 하는 것은 경계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
을까 생각한다.
누구에게든 스승은 있다 . 그래서 보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 마치 브랑
쿠지가 그의 스승인 로댕 곁을 떠나면서 남겼던 그 유명한 일화 "거대한 고
목 밑에서는 잡초도 자라지 못한다" 는 명언은 아직도 스승의 문하에서 작업
을 하는 작가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 해준다.
이경재의 경우도 그가 조각을 배웠던 스승들의 영향과 흔적이 인체를 다루는
기법이나 기교 , 사믈을 묘사 해내는 부분에 간헐적으로 남아 있음을 털어낼
필요와 때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때로 당시에는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훌
륭한 선생의 문하에서 조각을 다루는 모든 테크닉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다
는 점에서 이경재로서 대단히 유익하고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위로는 스승이 없어야 하며, 옆으로 벗
이 없어야 하며 , 아래로는 제자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
그래야만이 독특한 표현과 양식으로 모두에게 감동적고 생명력 있는 작품을
창조 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이경재의 이번 전시는 그의 새로운 조형성과 독창성을 열어 보이
는 계기를 갖게 되는 아주 의미 있는 전시가 되리라 여겨진다.
김종근 (홍익대 겸임교수. 미술평론가)